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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다라 색칠 명상 [2016… - 컬러링북
  • 이 수행은 일상 생활의 꿈과 같은 본성을 인식하고 그런 인식이 꿈에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깨면 스스로가 잠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엌에 들어가면 꿈속의 부엌에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꿈속의 커피에 꿈속의 우유를 넣습니다.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하루 종일 자신에게 상기시킵니다.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꿈을 꾸는 사람인 자기 자신에게 주안점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계속 되새깁니다. 분노나 행복, 피로와 불안이 모두 꿈의 일부입니다. 바라보는 나무도, 운전하는 차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모두 꿈입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속에 새로운 성향이 만들어져서 모든 경험을 비실재적이고 순간적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모든 경험이 마음의 투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현상이 비본질적이며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집착이 줄어듭니다. 감각이 마주치는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정신 활동의 경험이 꿈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차로 이러한 이해는 꿈속에도 스며들어,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라는 인식을 지니게 됩니다.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수행을 카르마의 흔적을 변화시키는 방편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수행과 마찬가지로 이 수행을 하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깁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해 습관적으로,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로 인해 생활과 꿈에 변화가 생깁니다.
    모든 경험을 꿈으로 여기면 경험은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우리에게 행사하던 힘을 잃습니다. 그 힘은 우리가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하거나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몰아가는 일이 없게 됩니다. 그와 반대로 모든 경험이 고요해지며 훨씬 더 명확해집니다. 그리고 삶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수행을 통해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개념적인 의미 위에 덧붙여진 투사된 의미를 없애는 것입니다.
    경험을 다른 시각으로 마주하게 되면 우리의 행동에도 변화가 옵니다. 행동의 변화는 카르마의 흔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꿈의 뿌리가 변하게 됩니다.

    이 수행을 이해하는 두 번째 방식은 실제의 삶이 꿈속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모든 경험은 마음의 투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고, 모든 경험은 카르마의 영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카르마의 작용은 모든 사건과 사물에 미묘하게 스며들어 있으며 과거에 생겨난 원인과 결과의 끝없는 회전이 현재를 만듭니다.
    모든 행위의 결과는 다음 행위의 원인이 됩니다. 모든 현상은 비어 있으며 드러나는 존재의 본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향해 이처럼 하나씩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 두번째의 방식입니다.
    진정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꿈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겨났다가 존재의 기본 바탕인 빛나는 비어 있음으로 스스로 녹아 드는 덧없고 비본질적인 겉모습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꿈이다"라는 말의 진실함을 완전하게 깨우친다면 우리는 개념화라는 오랜 습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환상을 사실로 여기는 삼사라의 왜소한 삶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러한 깨우침을 얻으면 우리는 비로소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됩니다. 존재할 다른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을 꿈으로 보는 것.
    외부의 대상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내면에 그 자극에 대한 반응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꿈이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강렬한 수행이며 수행자에게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꿈에서나 일상생활에서 명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수행을 할 때는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책임감을 잊지말고, 일상적인 생활의 논리와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건물에 올라가 뛰어내린다고 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상대적인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너와 나라는 것이 있는 한, 우리가 사는 상대적인 세상이 존재합니다. 고통을 당하는 다른 생명체들이 있고 자신이 내린 결정에서 비롯되는 결과 또한 존재합니다.


    -잠과 꿈의 명상 中-"카르마의 흔적을 바꾸기"
  •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마음이란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으며 진아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진아가 바로 아트만(Atman) 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中-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라마나…"
  • 당신은 본래 '신의 자식'이니까 당신에게 필요한 일체의 좋은 것은 이미 베풀어져 있는 것으로서 누구도 그것을 방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과 당신과의 사이를 떼놓을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신과 당신과의 사이에 둑을 쌓고 신으로부터의 '무한공급'을 저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미망의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스스로 자기를 묶어서 자유를 잃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곧 당신의 그 자승자박을 풀어버리고 본래의 자유를 회복하라. 그때 당신의 생명은 자유자재를 얻어 하는 일 모두 원만 대조화를 이루어서 순조롭게 진행되고 원하는 것은 자연히 갖추어져 오는 것이다. 당신이 '신의 자식'으로서 신과 연결되고 '신과 일체가 돼서 행동하는 것이다'고 하는 자각을 얻을 때 이미 아무것도 겁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번영하는 생활365 中-"자승자박을 풀고 신과 직통한다."

  • 11. 달마의 실체론(實體論)





    경전에 이르기를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무지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리이다.


    마음이 존재할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거짓이다.








    그대가 깨달아 알게 될 때는 실체가 그대를 따르게 된다.


    그대가 깨닫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를 따르게 된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는 실재적이지 않은 것도 실재적으로 되지만,


    그대가 실체를 따를 때는 실재적인 것도 허구로 변한다.


    그대가 실체를 따르면 모든 것이 거짓이 된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만이 모든 것이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을 때 그의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를 나타내지 못하며 실체는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는다.


    실체와 그의 마음은 모두 고요하며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이 없다."라고 했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마라. 그대가 질문할 때 그대는 이미 잘못 되었다.


    그대가 미혹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대가 각성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열반과 불멸을 맛본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가 도를 발견할 때 역시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대가 도를 찾는 데 마음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벌써 미혹된 것이며 거기에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거기에 불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곧 불성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라.


    삶 속에서 그대는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어떤 재생도 없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형체에 미혹되지 않고 형체를 보며, 소리에 미혹되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해탈의 상태이다.


    형체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바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다.








    미혹됨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미혹되는 순간 마음은 지옥으로 변한다.





    12. 달마의 불종자론(佛種子論)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 위에 있다.





    그것은 아라한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이 열반에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열반을 보게 되면 그대는 마음 밖 어떤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 미혹된 것이다.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으로 인해 지혜를 찾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못한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淨土)에 사는 것이다.








    진리가 아닌 말이 없다.


    어떤 것을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고도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그의 침묵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할 때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 그대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그 침묵은 그대의 무지에 묶여 있다.








    말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토(穢土) - 더러운 땅, 이승 &ambr;lt;-&ambr;gt; 정토(淨土)





    13. 달마의 중생론(衆生論)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보라.


    한번 그대가 부처를 보았다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세 가지 독에 중독되면 그것은 중생심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지면 그것은 불성이 된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불성은 없다. 얼음의 본성이 바로 물의 본성이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낼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서 해탈된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은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는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텅 빈 것을 알고 그대가 어떤 형체도 없음을 볼 때 그대는 미혹과 깨어 있음을 모두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미혹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없고, 저쪽 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아라한은 이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14. 달마의 삼신론(三身論)








    부처는 세 가지 몸을 갖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고 부른다.


    부처의 응신은 중생이 착한 일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그들이 지혜를 얻을 때 나타나며, 법신은 중생이 궁극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는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가지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 몸이란 말은 단지 사람들이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중하의 세 가지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부처를 화신불로 보고서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해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에 이른 사람들은 부처를 보신불로 생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불성을 경험하기 위해서 부처를 법신불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궁극적인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부처를 어떤 모양(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사람이 업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업이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이 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응보도 받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업을 짓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성취한다."고 했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이 사라짐과 함께 해탈한다.








    성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현이다.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중생의 말을 포기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성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현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곧 성현의 지혜임을 믿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경전을 설하지 말라."라고 했다.


    또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보는 모든 모양은 모양이 아니다. 모양 아님을 알면 그대는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진리에 이르는 문은 무수히 많으며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의 모양이 허공처럼 투명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중생은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배가 부를 때도 굶주림을 걱정한다.


    거기에는 커다란 불안이 항상 있다.





    그러나 성현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에도 매이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들은 도를 따라 산다.














    삼신불(三身佛)


    법신(法身) - 만유의 본체, 비로자나불, 대일불(大日佛), 자성불(自性佛)


    보신(報身) / 응신(應身) - 유형불신(有形佛身), 인연에 따라 나타난 불신(佛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자를 제도하기 위해 화(化)하여 나타난 불신(佛身),


    석가모니불





    15. 달마의 혁파론(革破論)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나무와 같다.


    모든 과일과 꽃들, 그리고 모든 가지와 잎들이 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위대한 보살이 완전한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마음의 활동에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순수함과 불순함이다.


    순수한 마음은 선한 행동을 기뻐하며 불순한 마음은 악을 생각한다.


    불순함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곧 성현이다.


    그들은 고통을 초월해서 열반의 축복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은 불순한 마음의 덫에 걸려서 자신의 업에 얽매여 있다.


    그들이 곧 중생이다.


    그들은 삼계를 방황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집착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들의 불순한 마음이 그들의 진아를 가리는 것이다.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부서지지 않는 불성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고 했다.


    그러나 한번 오감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독 안의 빛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리워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 있음에 대한 자각이다.


    그것은 남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깨어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라고 했다.








    모든 선행은 이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는 모든 미덕과 열반의 과실을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한다.





    16. 달마의 무명론(無明論)








    "당신께서는 우리의 불성과 모든 덕성이 각성이라는 근원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떤 근원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수많은 집착과 정욕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 즉 무명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독에 중독된 마음은 셀 수 없이 많은 약을 갖고 있는데, 마치 나무가 하나의 둥치에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세 가지 독은 수백만 개의 약을 만들어 내는 나무의 예와 거의 같다.








    세 가지 독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감각의 식(識)에 물들여 있다.


    그것들은 도둑이라고 불리는데 감각의 문을 빠져나와 마구 다니면서 한없이 욕심을 내고 악에 탐닉하고 위선의 가면까지 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근원을 잘라 버린다면 그 강물은 곧 말라 버릴 것이다.


    만일 해탈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독을 세 가지 진리로 바꾸고, 여섯 도둑을 육바라밀로 바꾼다면, 그는 자신을 그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은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면 육도의 업은 어떻게 다릅니까?"








    참된 수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먼 선행만 쌓는 사람은 삼계에 태어난다.


    눈먼 사람은 어리석게도 열 가지 선업을 쌓고도 행복을 추구하는 바람에 욕망의 세계에 신으로 태어날 것이다.








    오계를 지키고도 어리석게 애증에 몰두하는 눈먼 사람은 분노의 세계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눈이 멀어 현상의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은 거짓된 가르침을 믿으며 축복 받기를 원하는 바람에 미혹의 세계에 악마로 태어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주목해서 그것의 거짓과 악을 초월한다면 존재하는 데서 오는 고통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한번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대는 진짜로 자유롭다.








    17. 달마의 돈오론(頓悟論)








    "그러나 부처는 '삼 아승지겁 동안의 셀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는 어떤 연유로 단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삼독심을 극복하고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 아승지겁은 바로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범어로 아승지겁이란 말은 그대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 삼독에 물든 마음에서 셀 수 없는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은 영겁의 세월동안 계속된다.


    부처가 삼 아승지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무수히 많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보살들은 삼학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마음을 지켜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서 누가 과연 깨달음에 이르겠습니까?"








    삼학은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삼독을 극복했을 때 그대는 삼학의 한량없는 덕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선한 생각을 그대의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게 할 것이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감각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는 '피안에 이르는 방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섯 가지 감각에 낀 때를 벗겨 냄으로 해서 육바라밀은 그대를 집착의 강을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해 줄 것이다.








    "경전에 따르면 삼학에 대해서 '나는 모든 덕을 행하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악을 끝내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임을 맹세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께서는 삼학이 단지 삼독심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경전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의 경전은 진리이다.


    그러나 오래 전 위대한 보살이 깨달음의 씨앗을 심고 그것을 키울 때, 그가 세 가지 맹세를 한 것은 이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덕을 행하겠다는 말은 탐욕의 독을 없애기 위한 것이며, 모든 악행을 그치겠다고 맹세한 것은 성냄의 독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 것은 어리석음의 독을 다스리는 지혜를 닦기 위해서였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지키는 것은 삼독심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이 세 가지 독을 극복함으로써 그의 모든 죄업을 다 청산하고 악행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그는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로써 덕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덕을 쌓음으로써 악행을 끝내는 것은 곧 모든 수행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18. 달마의 육바라밀론(六波羅蜜論)








    그대가 닦은 수행은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경에 이르기를 "그들의 마음이 불순하면 존재 역시 불순하고,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면 존재 또한 순수하다."고 했다.





    또 이르기를 "불국토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의 마음을 정화하라.


    그대의 마음이 정화됨에 따라서 불국토가 청정해진다."고 했다.





    이리하여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깨끗하게 다스림으로 해서 계, 정, 혜, 삼학이 저절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경전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그 바라밀이 감각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왜 그것들을 뗏목이라고 부릅니까?"








    바라밀을 닦고 여섯 가지 감각을 정화하는 것은 여섯 가지 도둑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안목의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시각의 도둑을 몰아내는 것이 곧 보시(布施)이다.


    소리의 세계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청각의 도둑을 제압하는 것은 지계(持戒)이다.


    냄새의 세계에 중용을 지킴으로써 후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인욕(忍辱)이다.


    맛의 욕망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미각의 도둑을 평정하는 것이 정진(精進)이다.


    감촉의 세계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촉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선정(禪定)이다.


    미혹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의 도둑을 조복(調伏)시키는 것이 지혜(智慧)이다.





    이 육바라밀은 그대를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나룻배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뗏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 보살이셨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먼저 세 그릇의 우유와 여섯 국자의 죽을 마셨습니다.


    만약 그가 불성의 열매를 맛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면 어떻게 마음을 기켜보는 것으로만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마신 우유죽은 보통의 불순한 우유죽이 아니라 불법의 우유죽을 마신 것이다.





    이 세 그릇의 우유란 삼학을 말하는 것이며, 여섯 국자의 죽이란 육바라밀을 뜻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불성의 열매를 맛보게 한 순수한 불법의 우유를 마셨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불순한 세속의 암소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중상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세속의 어떤 집착에서도 영원히 자유로운, 썩지 않고 정욕도 없는 불법 자체를 마신 것이다.


    그러니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불순한 우유죽을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경에 이르기를 "이 황소는 고원이나 들판에 살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이나 여물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암소와 함께 살지도 않는다.


    그 황소의 몸빛은 타오르는 황금빛이다."라고 했다.


    그 황소는 비로자나불이다.





    모든 존재를 향한 그의 큰 자비심으로 인해서, 그의 몸에서 삼학과 육바라밀의 순수한 우유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해탈을 추구하는 모든 이를 양육한다.


    그런 순수한 법신에서 나오는 젖은 여래를 낳게 하고 불성을 성취하게 한다.


    그것을 마시는 자는 영원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조복(調伏) : 1.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하여 온갖 악행을 제어함


    2. 부처의 힘으로 원수나 악마 따위를 굴복시킴








    육바라밀(六波羅蜜) -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선정(禪定), 반야(般若), 지혜(智慧)





    19. 달마의 수행론(修行論)








    경전을 통틀어서 부처는 중생들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좋은 일을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좋은 일이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꺼지지 않은 등잔에 불을 밝히고, 하루에 여섯 번씩 참선을 하고, 탑을 돌며 단식을 하고, 예불를 드리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것에 이 모든 수행이 다 들어 있다.


    그때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부수적인 일이 된다.








    부처의 경전에는 셀 수 없는 비유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중생이 마음의 표면만 겉돌 뿐 깊숙한 것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서 그 오묘함을 나타내었다.


    내면의 수행 대신 외부적인 일에만 집중하면서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상가라마, 즉 청정한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삼독심에 물들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의 감각의 문을 청정하게 지켜야 한다.





    그의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며 안과 밖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절을 짓는 것이다.


    불상을 조성하는 것 역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든 종류의 수행을 닦는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향을 사르는 것은 물질적인 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불법의 향이다.


    그리하면 무명과 악한 행위가 그 향내와 함께 멀리 사라질 것이다.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제자들에세 그런 귀한 향에 깨어 있음의 불을 붙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십방(十方)의 모든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날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백단향이나 유향으로 만든 물질적인 향에 불을 붙이고, 오지도 않을 미래의 축복을 빌고 있다.








    미덕의 꽃을 뿌리는 것 역시 같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불법을 말하는 것에 해당되며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 주는 것이며 진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여래는 자기를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꽃을 꺾어 식물에 해를 끼치도록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여래의 가르침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은 천상과 이 땅에서 어떤 생명의 모습도 해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실수로 어떤 생명을 해쳤다면 그대는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계를 어기고 앞날의 복을 받기 위해서 생명을 해치는 자는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축복을 슬픔으로 바꾸려고 하는가?


    꺼지지 않는 등불은 완전한 깨어 있음을 나타낸다.








    오래 전에 연등불(練燈佛)이라고 하는 부처가 있었다.


    그 이름의 뜻은 그의 양미간에 있는 한 터럭에서 나온 빛이 무수한 세계를 비출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니 기름 등잔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루에 여섯 번 참선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탑 주위를 도는 것은 곧 탑이 그대의 몸과 마음이다.





    그대의 깨어 있음이 멈추지 않고 몸과 마음의 주위를 돌 때 그것을 곧 탑돌이라고 부른다.








    단식을 하는 것도 같은 진리를 담고 있다.


    단식을 하는 것은 그대의 몸과 마음이 흩어지거나 방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번 그대가 미혹의 음식 먹기를 멈춘 뒤에 그대가 그것을 다시 만진다면 그것은 단식을 깨뜨리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깨뜨리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한다.








    이 세상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미혹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모든 형태의 악에 물들게 한다.


    그들은 정욕에 마음껏 탐닉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의 음식 먹기를 그만두고도 그것을 단식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예불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방편을 이해하고 인연을 맞추어야 한다.


    방편에는 행동하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무위를 모두 갖추고 있다.





    예불이란 존경과 겸양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진아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고 미혹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악한 욕망을 몰아내고 착한 생각에 머무르면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예불이 된다.








    외부 세계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 대신에 내면으로 향한 수행에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무지와 증오와 악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위엄 있는 태도와 성현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장점을 갖추고 있더라도 결코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20. 달마의 안심론(安心論)








    "그러나 욕장경(浴場經)에는 '승려들을 목욕시키는 공덕은 무한한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외부적인 덕행이 깨닫는 데 보탬이 된다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승려들의 목욕이란 말은 육체를 씻는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가 욕장경을 설법할 때 그는 제자들이 불법을 갈고 닦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진리의 참뜻을 찾는 행위를 목욕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욕장이란 육체를 말한다.


    그대는 지혜의 불을 때고 올바른 견해의 물을 데워서 그대 속에 있는 참된 불성을 깨끗이 닦아라.








    그리고 일곱 가지 수행들을 잘 지킴으로 해서 그대는 덕을 쌓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승려들은 밝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의 참뜻을 이해했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들의 덕을 완성했으며 불성의 열매를 맛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경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의 참된 불성은 모양이 없다.


    그리고 집착의 때에도 모양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은 평범한 물로 보이지 않는 몸을 씻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언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씻기 위해서는 그대가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번 욕망으로부터 더러움과 오물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그대의 안과 밖을 모두 덮어버릴 때까지 계속 생겨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 몸을 깨끗이 씻고자 한다면 그대의 육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도 안 된다.








    그러니 그대는 욕장경에서 부처가 한 말이 어떤 외부적인 닦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경전에는 사람이 진심으로 부처를 부르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








    부처는 깨어 있음을 말했다.


    몸과 마음이 깨어 있을 때 거기에서 어떤 악도 일어날 수가 없다.


    부처를 부르는 것이란 그대의 마음을 부르며, 그 마음으로 하여금 수행의 법칙을 따르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대는 불법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입은 공허한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아집과 삼독심으로 고통을 받는 한 그대의 더럽혀진 마음은 그대로 하여금 부처를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모양에 집착한다면 그 의미를 찾더라도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현들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수행을 했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또한 이 마음은 모든 힘의 으뜸이다.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에 닿아 있는 여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그것에 어떻게 이르는 지 걱정하지 않는다.


    여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건너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요사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모양을 갖춘 것을 장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재산을 함부로 탕진하면서 수륙의 생물들을 살생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즉각적으로 집착한다.








    만일 그대가 모양 없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현세의 작은 행복을 탐하느라 그들은 곧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헛된 수행을 하고 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미래의 축복만을 이야기한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고로움 없이 그대는 무수한 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출처 : www.dochang.bre.kr
    "달마 어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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